안녕하세요.
지난번엔 답장이 늦어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과 달리 꽤 잘 먹고 잘살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하루하루 ‘지역이 기회다’라는 말을 체감하고 있다는 말에도 마음이 놓였어요.
전주 덕진호라는 호숫가에 자리한 그림 같은 도서관, 연화정도서관에서 편지를 씁니다. 지난 주말에 전주의 몇몇 도서관을 둘러보다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시간에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침 전주에 볼 일이 생겨 며칠 만에 다시 찾아왔죠.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야 이 도서관의 진가를 느껴요. 선배님도 꼭 시간 내서 들르길 바랍니다. 주말은 피해서요.
전주는 부러운 도시에요. 알면 알수록 가진 게 많은 도시죠. 다른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이런 독특한 도서관도 여러 곳 있어요. 2021년 4월,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시간을 두고 11곳의 도서관을 새로 조성했다고 해요. 혹시 전주에 왔다가 여유가 생기면 다가여행자도서관이나 동문헌책도서관을 비롯해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시간을 보내보길 바랍니다.
전주는 ‘책의 도시’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에요. 전주가 아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불에 타 남아있지 않았을 테고, 또 예로부터 한지의 고장으로 이름을 알린 곳이에요. 지금도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이 이곳에 많이 남아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같은, 한양 밖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한글 소설들이 전주에서 널리 출간돼 읽혔어요. 한양에서 만든 경판본과 달리 전주(완산)에서 만든 완판본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담겼다고 해요. 전주는 못하는 게 없는 얄미운 형제같은 도시에요.
실은 연화정도서관을 보려고 일부러 전주를 찾은 건 아니었어요. 며칠 전부터 차가 말을 안 들어서 가까운 정비소에 갔는데,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전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길래 아침부터 30분을 달려왔어요. 정말 여느 정비소의 수십 배쯤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춘 정비소가 전주에 있더군요.
1년을 살아보니 익산엔 없는 것들이 더러 있었어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써브웨이’가 없어서 놀랐어요. 다행히 여섯 달이 지나 모현동에 써브웨이가 문을 열었죠. 이곳을 기다렸던 건 저만은 아니었나 봐요.
“익산에도 ‘써브웨이’ 첫 상륙 반응 뜨거워”
익산엔 아이맥스 영화관도 없어요. 지난해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을 때 큰맘 먹고 아이맥스로 보려고 찾아봤는데 안타깝게도 익산엔 그런 극장이 없었어요.
익산엔 백화점도 없죠. 며칠 전 익산에 들어오려던 코스트코도 들어오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자주 가던 곳들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날 때가 있긴 해요.
어느샌가 사라지는 곳들도 있어요. 4학년 올라가는 아들 컴퓨터를 바꿔주려고 1년 만에 집 근처 가전 매장을 가려고 보니 없어졌더군요. 이사 오면서 냉장고며 에어컨이며 이것저것 샀던 곳인데 몇 달 사이 문을 닫고 말았어요. 별수 없이 멀리까지 가야했죠.
아들과 두어 번 갔던 패밀리레스토랑도 어느 날 보니 문을 닫았어요. 익산에는 서울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이름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이 한 곳도 남아있지 않아요.
정말 있었으면 하는 것들은 따로 있어요. 익산을 다룬 책이에요. ‘대한민국 도슨트’, ‘아는 동네’, ‘Tripful’,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등 여러 단행본 시리즈에서 전주는 물론이고 군산도 심심찮게 다루고 있지만 익산은 한 번도 다룬 적이 없어요. 허영만의 <식객 : 전북편>에도 익산의 음식은 찾아볼 수 없죠.
이쯤 되니 선배님이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익산을 설명하다 지쳐서 나중엔 그냥 ‘전주 옆에 있는 도시’라고 했다는 게 이해가 돼요. 익산은 전라북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지만, 전주에 견줘 없는 것도 많고, 어쩌면 누군가에겐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도시로 비칠지 모릅니다.
너무 기운 빠지는 이야기였나요. 그렇다고 오해는 마세요. 익산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사람들이 익산을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보면 익산은 정말 가진 게 많은 도시에요.
먼저 익산은 일찍이 고대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에요. 이 지역은 평양과 경주를 빼면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가 발견된 곳이라고 해요. 그래서 ‘익산 청동기 문화권’이라도 불러요. 금강과 만경강 사이, 그러니까 지금 익산이 자리한 이 너른 평야지대에 뿌리를 내린 청동기인들이 마한이라는 고대국가를 세웠어요.
또 아직 논란이 있긴 하지만 훗날 백제가 왕도를 세운 곳이기도 해요. 그러니 왕궁터와 미륵사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이 많을 수밖에요.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익산 미륵사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王都)의 꿈이 서린 곳이며, 한국미술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석탑의 시원이 지금도 그곳 폐허 속에서 금자탑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과 만경강이라는 물길을 타고 시작된 이 도시의 역사는 1912년 호남선 철길이 열리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아요. 길게 이어진 물길과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곳곳에서 숨어있던 이야기들을 맞닥뜨리게 돼요.
앞으로 그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들려줄께요. 이런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익산이라는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어요. 또 그러다 보면 한 권의 멋진 책으로 엮일 수도 있겠죠. 같이 해보시게요.
그럼 또 봅시다.
2023년 3월 23일
윤찬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