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편지 잘 받았어요. 고향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더군요. 중앙동에 머무는 애틋한 시선도 함께. ‘더 빨리 올 걸 그랬다’는 말은 ‘더 잘 해줄 걸 그랬다’는 말로 읽히기도 했어요. 그래도 1년 사이 골목마다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제법 생기고, 이웃과 공동체의 의미를 몸소 알아가고 있다니 반갑기도, 부럽기도 했습니다.
낯선 익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가만히 돌아보니 익산에 살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더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 도시를 바라볼 수 없었어요. 책을 쓰느라 자주 찾았던 공주나 군산, 또 영도 같은 도시가 주는 정겨움이나 설렘도 거의 느낄 수 없었죠. 익산은 좋든 싫든 앞으로 제가 뿌리내리고 살아가야 할 곳이니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좋은 것들만 골라 담아 떠나면 그만인 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래도록 살아갈 도시’니까요. 밥벌이의 고단함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죠. 또 여행자와 달리 이곳에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겐 이방인이라는 처지가 늘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여행지가 주는 설렘이나 고향이 주는 푸근함은 아니지만, 조금씩 정이 들어가고 있다고 할까요. ‘살갑다’는 말이 좋겠어요. 익산은 저에게 ‘살가운 도시’가 돼가고 있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자세히 알아보기)를 겪은 최윤경 선생님 얘기를 했었죠. 맞아요. 우리가 같이 되살리기로 한 중앙동을 이해하려면 그 가슴 아픈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1977년 11월 11일 밤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열차에 실려있던 폭약이 폭발하던 그 순간, 역에서 900m쯤 떨어진 기자실에 있던 나훈 <경향신문> 기자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벼락 친다고 하는 것은 좀 약하고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그래서 그 순간에 느낌이... 저 원자폭탄 떨어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렇게 굉음이 컸었다 이 말이요. 그래서 그 굉음이 나는 그 순가에 ‘아, 원자폭탄 떨어졌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중략) ... 밖은 전부 암흑이 됐는데, 그래도 가봐야 할 것 아니오. 그래서 뛰어서 이리역전 쪽으로 가는데 중앙동 일대가 전부 유리, 유리파편이 와가지고 유리바닥을 걷는 지경이 됐어. 불빛은 하나도 없고 그래도 소리 나는 쪽으로 역전 쪽으로 뛰어갔는데, 역전에 가니까 통제를 해가지고 다시 폭발물이 다시 2차로 터질 일이 있다, 그래 가지고... (후략)” (『이야기로 듣는 이리ㆍ익산 그리고 사람들Ⅰ』에서)
역설적이지만 만약 폭발사고가 없었다면, 그리하여 중앙동을 비롯한 익산역 주변 동네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적어도 이 도시의 외형적 발전은 훨씬 더뎠을지도 몰라요. 이리역 폭발사고가 나고 겨우 13일 만인 11월 24일에 박정희 정부는 ‘새이리 건설종합계획’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도시 재건에 나서게 돼요. 여기엔 새 도로를 내고 아파트를 짓는 것뿐 아니라 대규모 산업공단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담겨 있었죠. 2년 뒤 박 대통령이 죽고 유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모든 계획이 그대로 실현되진 못했지만, 익산역에서 원광대까지 이어진 ‘익산대로’와, 익산역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까지 곧게 뻗은 ‘중앙로’가 이때 만들어졌어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건데, 이리역사도 지금 익산역 자리에 있지 않았어요. 중앙로가 새로 뚫리기 전에는 익산대로16길, 그러니까 중앙로에서 동쪽으로 한 블록 더 들어가 중앙로와 나란히 나 있는 길이 중앙동에서 가장 큰 길이었어요. 이리역에서 건너와 그 길 왼쪽 두 번째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그 유명한 삼남극장이 나왔죠. 1970년대까지는 이리역도 그 길이 시작되던 곳, 지금 익산역 동주차장 ‘4.19학생의거기념탑’이 서있는 자리쯤에 있었다고 해요. 폭발사고가 나고 중앙로가 새로 나면서 익산역도 중앙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옮겨간 셈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크고 멋진 역사를 지은 건 그 훨씬 뒤의 일이죠.
이제 익산역을 나와 계단 위에서 중앙로를 내려다볼 때마다. 또 익산대로를 지날 때마다 그 길에 새겨진 숱한 이야기와 길 위에 쌓인 역사의 무게가 전해지겠죠. 그렇게 저는 조금씩 익산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